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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매일신문]헌법 위의 권력은 오로지 국민뿐이다

‘두 개의 판결’. 당시 박근혜 대통령후보는 인혁당 사건에 대한 사법부의 재심판결에 대해 그저 대법원의 두 번째 판결일 뿐이라고 말했다. 듣는 사람들은 귀를 의심했다. 사법제도에 대한 무지의 소치라면 차라리 다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답변의 기저에는 사법부의 판결 정도는 얼마든지 바꾸어버릴 수 있다는 인식이 깊숙이 깔려있었다.

박 후보의 이와 같은 발언은 지지율 하락과 비판 여론에 떠밀려 황급한 사과로 마무리되었지만, 본격적으로 고개를 들기 시작한 우려는 해소되지 않은 채 박근혜 정부는 출범했다. 그리고 우려가 현실이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두 개의 판결’ 발언은 헌법의 근간 자체를 위협하는 신권위주의시대의 서막에 불과했던 것이다.

 

당장 인선에서부터 불안한 징조는 역력하다. 심지어는 인사검증팀의 사퇴 촉구가 나올 정도로 부실한 기초 검증에서부터 후보자의 자질에 이르기까지, 박근혜 정부의 인사 난맥상은 그야말로 종합선물세트라 할 만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염려스러운 것은 인사권자의 전횡이 국민적 여론을 외면하는 것을 넘어서서 헌법의 근간을 흔드는 데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동흡 전 후보자의 낙마 이후 헌재소장 자리는 두 달 가까이 공석이었다. 그 대행을 맡고 있던 송두환 재판관 역시 임기 만료일이 임박하고 있던 차였다. 두 명의 재판관이 자리를 비우게 되면서 헌재의 업무마비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꿈쩍도 않다가 임기만료를 하루 앞둔 시점에서야 헌재소장과 함께 재판관들의 인선을 발표했다.

결과는 장고 끝에 최악수였다. 헌재소장은 검찰 내 공안통으로 유명했다가 2년 전 헌법재판소로 자리를 옮긴 사람이었다. 여야 양측에서 무난한 평가를 받고 있던 다른 후보자들을 다 물리치고 공안전문 검사를 지명한 것이다. 검찰총장도 아니고 국민의 기본권을 위해서라면 국가권력에 대해서도 맞서야 하는 것이 헌법재판소의 수장 자리가 아닌가. ‘공안 헌재’를 염려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이것도 모자라 감사원장을 교체한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감사원은 대통령 직속기구지만 업무의 독립성을 인정하고 있는 엄연한 헌법기관이다. 감사원장의 임기를 법률이 아닌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이유 또한 바로 이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 시절 정치적 중립성을 위해 경찰청장 임기 보장을 약속한 바 있었다. 그런데 경찰청장을 교체하더니 이제는 헌법기관의 장마저 갈아치우겠다는 말을 흘리고 있다. 헌법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국정철학은 대체 무엇인가.

 

헌법재판소장의 인선이 있었던 그 날 헌재에서는 긴급조치 1, 2, 9호에 대한 위헌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유신헌법에 대해서 직접적인 판단을 하지는 않았지만 긴급조치에 대한 위헌성을 판단하는데 있어 유신헌법을 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고 밝혔다. 유신헌법이 기본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는 반성에 기초하여 헌법이 개정됐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1980년 8차 개헌으로 국민들은 유신헌법에 대한 역사적 심판을 종결했다. 이로써 5.16혁명이라는 서슬 퍼런 문구 또한 우리 헌법전문에서 영구히 삭제됐다. 그런데 그로부터 32년이 지난 지금 불길한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다. 새 정부의 국무위원 내정자들은 청문회장에 나와 5.16쿠데타를 쿠데타라 말하지 못하고, 대통령은 다시 국정철학을 이유로 헌법의 권위를 넘나들려 한다.

그러나 헌재가 다시금 밝혔듯이 헌법 위의 권력은 오로지 국민뿐이다. 대통령의 권한 역시 헌법의 테두리 내에서 행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사권자는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어떤 명분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역사적 교훈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