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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도민일보] 정치꾼의 말보다 정치가의 해법이 절실하다

 ‘땅땅땅’

 기다리던 의사봉 소리가 본회의장에 울려 퍼졌다. 추경안이 국회에 제출된 지 한 달하고도 보름 만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자유한국당은 표결에 참여하겠다며 본회의를 하루 연기해달라고 요청해놓고 다음 날 회의가 열리자 반대토론만 끝내고 퇴장해버렸다. 비난의 화살은 추경안을 끝까지 나 몰라라한 야당이 아니라 야당 말만 믿다가 의사정족수를 미처 챙기지 못한 여당에게 쏟아졌다.

 서운함이 없진 않지만 사실 안타까움은 다른 데에 있다. 비난이든 칭찬이든 그것은 경기를 관람하는 관중의 일이다. 경기에 불만이 있더라도 선수는 관중과 함께 야유를 보낼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하는 것이 본분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정치판에선 선수의 본분을 잊고 관중과 선수의 경계를 넘나들며 경기의 본질을 흐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작년 예산심의 때 일이다. 전북의 주요산업 예타에 문제가 생기자 다른 당 도내 의원들이 갑자기 기재부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나섰다. 답답한 심정이야 십분 이해가 가지만 한창 예산안을 협의하는 국면에서 우리 예산의 목줄을 쥐고 있는 기재부를 적으로 돌리는 것이 과연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 되겠는가. 더욱이 정치란 승패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지난한 협상과 타협을 통해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 아닌가.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을 했다고 해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면 더더욱 마뜩찮다.

 결국 어그러질 대로 어그러진 기재부와의 막판 협상을 떠맡았던 필자는 한달음에 갈 길을 열 배는 돌아가야 했다. 일의 성사가 목적인지 책임의 회피가 목적인지 의심케 하는 이 같은 사례는 이것 말고도 부지기수다.

 정치에 대한 불신이 깊은 이유 중 하나는 쇼윈도우식 행태가 만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거철이면 시장에 가서 오뎅을 먹고 지킬 수도 없는 공약들을 거창하게 늘어놓는다. 일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면서 일단은 그럴듯한 사진 몇 장으로 할 일을 다 한 듯 포장을 하고 중간에 일이 틀어진다 싶으면 누군가를 비난하며 책임을 면피한다.

 이는 정치인의 자질 문제도 있겠지만,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인 헤르만 셰어가 지적한 바와 같이 정치인의 개인적 권한의 범위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데 사회의 거의 모든 문제를 그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사회의 이중 잣대도 구조적 원인을 제공한다.

 여기에 엄정하고도 공정한 감시자 역할을 해야 할 언론들까지 중심을 잃은 채 끓는 불 위에 냄비뚜껑처럼 춤을 추면 어느덧 문제해결은 뒷전으로 사라지고 소모적인 공방과 좌절, 그리고 정치에 대한 혐오만 남게 된다.

 그러나 정치가 도깨비방망이라도 되는 것처럼 모든 문제의 책임을 정치권에 떠넘기는 것도, 정치를 도깨비방망이 휘두르듯이 가만히 앉아서 주문만 외우며 때우려는 것도 모두 다 우리 사회를 개선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의 진용이 거의 채비를 끝내면서 곳곳에서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다. 사실 지난 촛불혁명의 가장 준엄한 명령 중 하나는 정치개혁이었다. 정치 불신의 벽을 허물고 정치의 본령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 때다.

 정치꾼은 다음 선거를 생각하지만, 정치가는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는 말이 있다. 반대는 쉽지만, 조정은 어렵고, 호의는 순간이지만 책임은 시간을 요한다. 때문에 넓은 문을 놔두고 좁은 문을 선택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쉽게 지은 집은 쉽게 무너지는 법이다. 정치가 정치답게 다시 서려면 화려한 말로만 포장하는 정치가 아니라 국민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 해법을 찾는 정치가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