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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이춘석이야기

정치인 이춘석이 되기까지


저 이춘석은 전북 익산시 황등면에 소재한 조그마한 농촌마을에서 5남매 중 막내로 1963년에 태어났습니다.

평범하게 초중학교를 마치고 남성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공부도 곧잘 하는 학생이었지만 형과 누나가 모두 남성고와 남성여고를 수석으로 나와 서울대에 진학했던 터라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2학년인 1981년, 학생운동을 하던 형이 대학을 포기한 후 군대에 가고 누나가 학교를 자퇴한 후 구로공단에 위장 취업했다는 사실로 부모님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예민한 사춘기를 넘기던 저에게도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부모님은 서울로 보내면 자식을 망친다는 생각으로 서울로 진학하려는 저를 만류하셨고 결국 저는 부모님께 부담을 드리지 않고 공부만 열심히 하겠다는 조건으로 4년 장학금과 기숙사, 생활보조금 지급을 약속한 한양대학교 법학과를 선택하였습니다.

평균서적 B+이하면 장학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조건은 부모님께는 심리적 안전장치였지만 저에게는 질풍노도의 사회 속에서 끊임없는 자괴감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집안은 물론, 지역사회의 기대를 받고 있었던 형과 누나를 변화시킨 동력이 무엇인지를 알고 함께 하고 싶다는 욕구와 부모님께 더 이상의 좌절을 드릴 수 없다는 책임감은 대학시절 내내 저를 무겁게 했습니다.



왜 사법고시를 보아야 하는지, 사법고시를 합격하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당위성을 스스로 부여하지 못한 채 저는 졸업한 이듬해 제30회 사법고시에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사법연수원에 입소한 뒤, 저는 사회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노동법학회에서 열정적으로 동료들과 공부하고 토론하면서 저의 고민은 조금씩 가닥을 잡을 수 있었고 결국 서민과 소외계층도 법률 서비스를 공정하게 받을 수 있도록 하는데 기여하자는 쪽으로 마음을 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에게 제가 가진 지식을 공유하고 나누어 줄 수 있다는 신념으로 판검사가 아닌 변호사를 선택하여, 고향인 익산의 관할법원인 군산지원 앞에서 변호사 사무소를 열었습니다.



그렇게 5년여를 보낸 후 당시 법원, 검찰청이 없어 변호사가 없던 고향 익산에 최초로 변호사 사무실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료법률상담을 시작해 어느 덧 7년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법률지식을 서민들과 나누고 조언해주는 정도의 소박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말조차 서툰 조선족 아주머니가 두 아이를 데리고 이혼소장을 들고 사무실을 찾았을 때, 어느새 그 분을 위해 직장을 알아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간단하게 이혼소송을 도와줄 수도 있었지만 남편을 만나 여러 번 설득을 하여 결국 재결합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가정과 직장에서 안정을 찾은 아주머니가 고맙다며 내민 사과 한 봉지가 어쩌면 그렇게 귀하게 여겨지던지……. 그 아주머니를 통해 변화한 제 자신이 스스로도 대견했습니다.

친정 부모님에 빚보증을 섰다가 이혼을 당하고 그나마 남은 9평 아파트 보증금마저 캐피탈회사에 빼앗기게 된 아주머니가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마음으로 변호사님을 찾았다”는 말을 하셨을 때는 허술한 우리 사회의 안전망에 부끄러움이 느껴졌습니다.
고민 끝에 많은 사람들의 탄원서를 모으기로 하고 수차례에 걸친 방대한 서류와 입증 덕분에 마침내 승소판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이 우유 값도 없어 인사도 못한다는 아주머니는 끝까지 눈물만 흘리셨습니다.



자식 뒷바라지 끝에 빚만 남았으면서도 그 사실이 자식들에게 알려져 혹여 마음에 짐이 될까, 개인파산 신청을 하시면서도 끝까지 마음고생을 하시던 노인, 추락사고로 경수 손상을 입어 월 32만원의 수급으로 삶을 이어가야 하는 장애인, 골수암에 걸린 동생과 장애인인 아버지, 극심한 관절염으로 거동이 불편한 아내를 부양하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하다 자신도 트랙터에 끼어 다리를 절단하게 된 가장…….

제가 만난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은 너무도 작았습니다. 소송이나 개인파산을 무료로 도와드리고 약간의 후원, 혹은 후원자를 찾아 연결하는 일, 그리고 안타까움에 혀를 차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7년……. 저는 비로소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습니다. 더 늦기 전에 서민과 소외계층을 위해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고 제도화하는 일, 스러져가는 익산의 경제를 보듬어 지역을 부흥시키는 일, 익산만이 아니라 전국가적으로 정직한 사람이 보상을 받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받은 따뜻한 신뢰, 그리고 절박하게 바꾸어야 할 현실을 잊지 않겠습니다. 더 이상 안타까움에 혀만 차고 있지는 않겠습니다. 여러분의 대표로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함께 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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