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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매일신문]충청과 호남이 아니라 수도권과 지방의 문제다

충청권의 의석수 문제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주장은 충청지역의 의석수를 늘려야 한다는 것인데 이유는 호남의 줄어든 인구수가 거론이 된다. 문제제기의 시점도 올해 9월 충청의 인구수가 처음으로 호남을 추월하면서부터다. 언제부터 의석수 많고 적음의 기준이 호남이었던가. 오히려 객관적 수치로만 보면 현재 충청권의 인구수 대비 의석수 비율은 ‘적정’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과연 이것이 단순히 충청 도민들의 대표성 문제일까? 주장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다른 생각이 든다.

 

지역별 인구분포의 문제는 우리나라 경제정책의 연혁과 맞물려 있다. 산업화와 함께 수도권 집중현상이 가속화되고 불균형발전전략으로 인해 경부선 중심으로 집중 투자가 이루어지면서 호남의 인구이탈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전국인구 대비 호남인구의 비율을 보면 1960년대에 24%이던 것이 90년대에는 13%로 거의 반토막이 났다. 대규모 산단은커녕 변변한 공장 하나 없다 보니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서울로 떠났던 것이다. 반면에 영남지역의 인구비율은 같은 기간 동안 3%밖에 감소하지 않았고 수도권과 거리가 멀지 않은 충청 지역 역시 감소폭은 6%에 불과했다. 정부의 불균형 성장전략의 가장 큰 피해자가 어디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수치라 하겠다.

이러한 국가 시책에 대한 반성적 고려에서 나온 것이 바로 지역균형발전전략이다. 참여정부에서 제기된 신행정수도의 이전문제는 수십 년 간 누적되어 온 지역 불균형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국가적 결단이었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시도는 안타깝게도 수도권이라는 거대한 기득권의 벽에 부딪혀 끝내는 좌절되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히도 이러한 시도는 지금의 세종시를 출범시킨 모태가 되어 충청권의 역사를 바꾸고 있다. 해서 이제는 그 동안 홀대를 받아왔던 지방민들의 시대가 조금씩 열리는가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충청과 호남의 문제가 불거져 나온 것이다. 한 마디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다. 지방의 서러움을 딛고 다 함께 잘 살아보자고 균형발전전략을 외쳤던 것 아니었던가.

 

주장하는 대로 인구수의 대표성이 문제라면 영호남의 과대대표된 의석수를 전부 모아 수도권에 몰아줘야 옳다. 그러나 호남의 의석수를 문제 삼는 사람들이 영남이나 수도권의 문제를 함께 제기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당장 충청지역 내에서도 기초․광역 선거구별 의석수가 인구 비례 원칙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도 획정위원회는 이를 조정하지 않기로 했다. 대전과 울산만 하더라도 인구는 30만 넘게 차이가 나지만 의석수는 동일하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선거구 획정이 단순히 인구수만 기준으로 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면적이나 지역 균형발전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의 선거구를 인구수만 기준으로 정하겠다고 한다면 미국의 양원제와 같이 지역대표성도 반영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장치를 아울러 제안하는 것이 마땅하다. 최소한 국가 정책상 지역적 불균형을 해소해야 한다는 명제에 동의한다면 그렇다. 그런데 이를 모를 리 없는 사람들이 마치 인구수만이 선거구 획정에 절대적 기준인 것처럼 호남을 견주어 의석수 문제를 왈가왈부하는 것은 그 주장의 숨은 의도를 의심하게 만든다.

 

이 문제는 결코 충청과 호남이 이전투구 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아직도 틈만 나면 수도권규제완화에 목소리를 높이는 수도권 중심의 기득권과 이에 맞서서 지역균형발전을 통해 활로를 찾아야 하는 지방의 문제다. 세종시가 행정중심복합도시로 자리를 잡고 충청 지역의 인구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같은 지방으로서 분명 반가운 일이다. 이는 우리 호남이나 전북에 대해서도 하나의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당장 코앞의 이익이 아니라 충청의 미래를 조금이라도 진심으로 염려한다면 지역균형발전의 흐름을 거스르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 고민해야 할 것은 전 국토면적의 11%에 불과한 수도권에 절반에 가까운 인구를 집중시킨 기형적 정책 기조를 바로잡는 일이다. 어떻게 하면 전 국민이 어디에서든 행복하고 윤택한 삶을 살 수 있게 할 것인가 하는 데에 중지를 모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