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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매일신문]이제 그만 대화의 장으로 나오시라

남들이 모두 "yes"라고 말할 때 "no"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우리는 그것이 소신이라고 믿고 있었다. 때문에 모 증권회사도 이 문장을 광고 카피로 내세우며 자기 회사가 군중심리에 휩쓸리지 않고 소신 있게 투자하는 회사라고 홍보했고, 김영삼 총재가 민자당과의 합당을 결정했을 때 당시 노무현 의원이 홀로 한 손을 높이 들며 "이의 있습니다"라고 외치던 그 장면은 그를 소신 있는 정치인으로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요즘 필자는 이 똑같은 문장에서 자꾸 다른 뜻이 읽힌다. 남들이 모두 그렇다고 하는데 혼자만 아니라고 하는 것, 이것이‘소신’이 아니라 ‘아집’일 수 있다는 것을.

 

5.16 쿠데타나 인혁당 사건에 대해 그것은 역사적인 평가에 맡겨야 한다고 했을 때나 10년간 이사장으로 재임하며 억대의 연봉을 받아 챙긴 정수장학회에 대해서조차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했을 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백번을 양보해서 부친의 유산에 대해서 애써 선을 그으려는 것이려니 생각했다. 그래서 진실을 인정하라는 요구를 하면서도 그렇다면 아버지를 부정하라는 것이냐며 심금어린 옹호를 하고 나설 때엔 동정심마저 느끼는 국민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였다. 처음으로 지명한 총리 후보자가 청문회도 하기 전에 온갖 도덕적 결함들로 일간지를 도배하자 난데없이 신상털기식 청문회를 탓하며 본인의 선택에 하자가 있을 리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더니 취임 직후엔 정부조직법 개편안을 두고 원안에 대한 야당의 어떤 이견도 허하지 않겠다며 타협의 싹을 잘라버렸다. 증세 없는 복지에 대해서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수차례 의문이 제기됐지만 그 때마다 지하경제를 양성화하면 된다는 말만 되풀이 하더니 결국엔 봉급자들 유리지갑만 털겠다는 세제 개편안을 내놓고 증세는 아니라며 또 다시 못을 박았다.
국정원의 대선개입 사태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가기관이 한 개인의 사조직처럼 운영됐던 초헌법적 사건의 전말이 훤히 드러났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여전히 그의 소신. ‘저는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습니다’라고 한 번 더 강조했다. 아직도 알아듣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배려였을까. 그 날은 바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첫 공판이 열린 날이었다. 우회적인 암시는 때때로 직설화법보다 더 강력한 전달력을 갖고는 한다.
 
독재자의 시대는 갔지만 독재는 새로운 방식으로 부활한 듯하다. 마음대로 전횡을 휘두르면서도 직접적인 비난을 피하는 데에 유체이탈 화법만큼 편리한 것이 있을까. 국정원이 주도한 대대적 관권선거로 당선되신 분과 국정원에 셀프개혁을 주문하고 나선 분이 다른 분인 것인지, 세법 개정안을 만들 때 당·정·청 협의를 주재하신 분과 과세 형평에 맞지 않는다며 원점 재검토를 지시하신 분은 또 다른 분인 것인지 국민들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 중에서도 유체이탈의 진정한 결정판은 이것이 아닐까. 여야로 대표되는 국민의 뜻을 모두 아울러 국정을 이끌어야 할 일국의 대통령이 정쟁에는 휘말리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 정치의 정점에 서서 정치와는 거리를 두겠다는 것은 유체이탈을 넘어 자기부정에 가깝다. 그러나 기실 민생과 정쟁이라는 이 교묘한 이분법 속에는, 의회는 언제나 민생과는 동떨어져 있으며, 국정을 논의해야 할 파트너가 아니라 정쟁이나 일삼는, 그래서 무시하거나 단속해야 할 골칫거리라는 인식이 전제돼 있다. 국민들의 오래 된 정치혐오증 뒤로 숨은 낯익은 그림자, 40년 전의 기억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민주당의 장외투쟁이 한 달을 넘기고 있다. 주말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국민들을 보면 사실 어디가 장내이고 어디가 장외인지 모르겠다. 본래 민주주의가 탄생한 곳은 아고라광장 아니었는가. 그러고 보면 정말 장외에서 강 건너 불구경을 하고 계신 분은 따로 있다. 이제 그만 대화의 장으로 나오시라. 모두가 아니라고 한다면 모두를 탓하기 전에 나부터 살피는 것이 순리다. 독단이 된 원칙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더욱이 이제 임기의 10분의 1이 지났을 뿐이다.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