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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일보] 국민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

지난 일요일 오후, 서울 혜화동 국립국제교육 건물에 국회의원들과 언론사 기자들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들을 만난 내부 직원들은 갑자기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더니 황급히 작업하던 사무실 불을 끄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불이 꺼진 사무실 안에는 미처 끄지 못한 컴퓨터 화면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뒤 이어 경찰들이 출동해 국회의원들의 출입을 통제했고, 모 보수단체들 회원들도 달려와 이들을 에워쌌다. 도대체 이 건물 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 

역사 교과서 국정화 실정법 위반

국립국제교육원은 교육부 산하기관이고, 방문한 국회의원들은 교문위 위원들이었다. 이들은 서울 모처에서 교과서 국정화 작업을 비밀리에 지원하고 있는 TF팀이 운영되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몇몇 언론사와 함께 현장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예상대로 사무실은 통제되었고 관계자 중 어느 누구도 만날 수가 없었다. 다만, 사무실 내부를 촬영했던 카메라에 포착된 컴퓨터 화면에는 청와대를 의미하는 ‘BH’폴더가 떠 있었다. 도종환 의원실에서 입수한 내부 문건에서도 ‘BH 일일 점검 회의 지원’을 담당하는 자가 별도로 배정돼 있었다. 청와대가 이 사안에 관한 한 매일매일 시시각각으로 보고를 받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심지어 문건에 기재된 홍보업무에는 기획기사 언론이나 기고자를 섭외한다는 등의 내용도 포함돼 있어 지난 번 국정원 사건과 마찬가지로 극우 언론 등을 통한 여론 조작 작업까지 의심되는 상황이다. 게다가 TF팀 단장은 현재 충북대 사무국장인데 정식 발령 절차도 없이 출장을 나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누가 봐도 이상하게 보이는 이 정체모를 조직에 대해 교육부는 지금까지 ‘정상적인 업무의 일환’일 뿐이라는 해명만 되풀이하고 있다. 

우리 아이들의 교과서를 만드는 일이 비밀공작이라도 된단 말인가? 이렇게 음습한 장소에서 떳떳하지 못한 방식으로 국정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만 봐도 이것이 얼마나 명분 없는 일인지를 알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정부의 이 같은 국정화 강행이 명백히 실정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청와대는 교과서 국정화가 교육부 내에서 알아서 한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국정화 관련 예산 44억을 예비비 지출로 승인한 사람은 바로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으로 출국하는 당일 예정에 없던 긴급 수석비서관 회의를 열어 교과서 국정화를 두려움 없이 추진하라며 강력히 독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날 국무회의에선 예비비 지출 안건을 신속히 의결했으며, 대통령은 출국 직전에 이를 승인했다. 이 날은 교육부가 행정예고를 발표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국정화 추진을 위한 모든 행정절차가 단 이틀 만에 일사천리로 끝난 것이다. 

이는 국정화 강행에 청와대가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는 것과 아울러 행정예고를 통해 수렴하게 돼 있는 국민들의 의견 따위에는 전혀 개의치 않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는 의견수렴의 결과를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존중하도록 돼 있는 행정절차법의 명백한 위반이다. 뿐만 아니라 관련 세부내역 자료 제출을 거부하는 것 역시 헌법상 국회의 예산심의권을 침해하는 일이다.

진실 감출 수 있다는 욕심 버려야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더니 정부가 국정화에만 혈안이 돼 있는 동안 민생은 벼랑 끝으로 치닫고 있다. 전세값은 치솟고 가계부채는 폭발직전이며, 10대 재벌의 사내유보금은 쌓여만 가는데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어 인생을 포기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정부는 위법한 절차에 동원된 국민 혈세 44억을 당장 환원해야 한다. 그리고 의견수렴 절차가 끝날 때까지 모든 국정화 강행 절차를 중단해야 한다. 역사책을 바꿔서 진실을 감출 수 있다는 우매한 욕심을 버리고 국민의 목소리에 다시 귀 기울여야 한다. 국민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