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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스센터/신문기사

[시사인]“상기 자료는 파일 비밀번호 모름”

장면 하나. 기획재정부에서 받은 답변 자료를 검토하던 한 보좌관이 형광펜을 들어 밑줄을 그었다. 중요해서가 아니라, 답변이 황당해서였다. 홍종학 민주통합당(민주당) 의원이 요구한 경제자유구역위원회 회의록(속기록) 2007년 8월14일 회의, 2007년 12월21일 회의 자료 요청에 대한 기획재정부 담당자의 답은 이랬다. “상기 회의 속기록 파일(한글)에 대한 비밀번호를 분실하여 파일 열람이 불가능한 관계로 속기록 제출이 곤란합니다.”

장면 둘. ‘복사 답변’을 받아든 한 보좌관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박한철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의 ‘2011년 이후 후보자 특수업무경비 사용내역’ 자료 요구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답변은 지난 2월13일 자진 사퇴한 이동흡 전 후보자 청문회 당시 보냈던 답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았다.

“관련 규정에 따라 특수업무경비 집행내역을 관리하고 있으며, (중략) 재판의 독립성과 중립성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으므로 공개하지 못함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사정기관이 주로 쓰는 예산 중 하나인 특수업무경비 내역 미제출에 대해 이 전 후보자 청문회 당시 증인으로 나왔던 사무관은 “(내역을 공개하지 않는 것은) 관행이고, 공개 시 파급효과를 고려했다”라고 답하기도 했다.

장면 셋. 이성한 경찰청장 청문회를 준비하던 진선미 의원실의 황두영 비서는 이 청장이 표절한 학위 논문을 ‘개인정보’라며 주지 않으려는 동국대학 관계자와 한참 입씨름을 해야 했다. 황 비서는 “학위 논문이 어떻게 개인정보냐고 물어도 무조건 안 된다고 했다. 고발하려면 하라는 식이다. 자료 제출을 성실히 하지 않는 건 켕기는 게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황 비서는 대학본부가 아닌 지인을 통해서 논문을 구해 표절 여부를 살폈고, 이 경찰청장은 인사청문회장에서 논문 표절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국회 보좌진들에 따르면 국회가 자료 요구를 할 때 피감기관이 거절 이유로 드는 흔해빠진 ‘거절 답변 3종’이 있다. 가장 흔한 유형이 ‘개인정보’를 이유로 드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관례’다. 과거에도 나간 적이 없는 자료라는 이유다. 그리고 재판 혹은 수사 중이라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자료를 줄 수 없다는 핑계도 단골 답변 중 하나다. “제출하려 했으나 자료가 없다”라는 답은 그나마 성의 있는 편이다.

보좌진들의 기 싸움, 갖은 방법 동원


행정부와 공공기관에 대한 자료 제출 요구는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의 고유 권한이다. 국회는 이를 통해 국정 전반에 대한 비판과 지적은 물론이고 입법 활동과 예산안 심의에 필요한 정보를 획득한다. 행정부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 제도인 셈이다. 국회법 역시 이를 규정하고 있다.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은 “국회로부터 공무원 또는 공무원이었던 자가 증언의 요구를 받거나, 국가기관이 서류 제출을 요구받은 경우에 증언할 사실이나 제출할 서류의 내용이 직무상 비밀에 속한다는 이유로 증언이나 서류 제출을 거부할 수 없다(제4조 ⓛ항)”라고 못 박고 있다.

  <div align=right ><font color=blue>ⓒ뉴시스</font></div>2012년 10월11일 강기정 의원(오른쪽)이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왼쪽)에게 자료를 요구하고 있다.  
ⓒ뉴시스
2012년 10월11일 강기정 의원(오른쪽)이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왼쪽)에게 자료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법대로’ 일이 진행되지는 않는다. 행정부가 자료 제출을 거부해도 현행법상 처벌이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출 거부 이유에 대한 소명서를 내지 않으면 3년 이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도록 되어 있지만, 이 역시 “국회 본회의나 위원회가 고발해야” 하기 때문에 실효성이 거의 없다.

그 때문에 국회 보좌진이라면 위에서 예로 든 것처럼 행정부의 자료 제출 요구 비협조에 대한 ‘불쾌한 추억’ 하나쯤은 갖고 있다. 제출기한(통상 10일)을 어기는 일쯤은 문제에 속하지도 않는다. 한 야당 초선 의원은 요구한 자료를 기한이 지나도록 주지 않는 기관에 “입법부에 대해 예의 좀 지켜달라”고 하소연한 적도 있다. 한 보좌관은 “국회가 국회법에 따라 자료를 요구해도 이 모양인데, 일반 국민의 정보공개 청구는 어떻겠는가”라고 되물었다.

국회의 자료 제출 요구 시즌인 인사청문회와 국정감사 기간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춘석 민주당 의원은 “청문회 기간만 어찌어찌 버티려는 후보자들 때문에 청문회 준비 기간은 대부분 자료 제출 거부와의 싸움이다. 민감한 자료들은 청문회 당일까지도 제출되지 않는 일이 다반사다”라고 말했다. 인사청문회가 자료 제출 미비를 이유로 파행을 겪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행정부가 모든 자료 요구에 비협조적인 것은 아니다. 행정부 밖으로 나가도 파장이 없을 ‘영양가 없는’ 정보라고 판단되면, 요청한 자료의 분량이 얼마가 되든 잘 내어주는 편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료의 경우 의원실에도 쓸모없는 자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예 김을 빼버리는 방법도 있다. 보좌진이 껄끄러운 자료를 요구할 경우, 국회에 자료를 제출해 문제를 크게 만들기보다, 해당 부처에 출입하는 기자에게 자료 일부를 슬쩍 흘리는 식이다.

입법부와 행정부의 이 같은 ‘밀고 당기기’에 보좌진들도 나름의 대응책을 세우곤 한다. 일종의 기 싸움이 벌어지는 셈이다. 국정감사 기간이 되면 기관장의 답변 자료를 미리 작성하기 위해 피감기관 직원들이 의원회관을 돌며 질의서를 미리 입수하러 다닌다. 이때 보좌진들은 자료를 제출하지 않거나 부실한 자료를 제출한 피감기관에는 질의서를 주지 않는 방법을 쓴다.

한 비서관은 행정부와 똑같은 방법으로 ‘복수’한 경험을 들려주기도 했다. “요구하는 자료마다 ‘제출할 경우 원활한 국정 수행이 어렵다’는 요지의 서면 답변이 오더라. 그래서 국정감사 기간에 그 기관이 질의서를 받으러 왔을 때 ‘원활한 의정활동을 위해 질의서를 드릴 수 없음을 양해바랍니다’라고 적어 문서로 만들어줬다.”

치사한 방법이지만 문서수발대장 사본 몇 년치를 요구하기도 한다. 공무원들은 문서로 일을 집행하기 때문에, 하루에도 문서 수백 건이 대장(목록)에 적히기 마련. 의원실에서 이를 요구할 경우, 담당 기관은 온종일 복사기를 돌려야 한다. 의원실이라고 이 대장이 꼭 필요해서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한 보좌관에 따르면 이는 일종의 말을 거는 방식이다. “자료를 워낙 안 주니까 일단 이걸 요청해놓고 관련 기관이 귀찮다고 투덜거리면, ‘우리가 일전에 요구한 자료 왜 안 주느냐’ ‘거절할 법적 근거가 있느냐’라고 묻곤 한다. 얘기가 잘 통하면 대장 사본 제출은 물론 없던 일이 된다(웃음).”

주변부를 공략하는 우회로를 뚫기도 한다. 자료를 요구한 해당 과에서 자료 제출을 거부하면, 주변의 다른 과를 괴롭히는 방법이다. 한 국회 참모는 “해당 과가 아닌 주변 과에 폭탄 자료를 요청한다. 그러면 폭탄 떨어진 과에서는 ‘이 의원 방이 지금 왜 이러나’ 알아보다가, 어느 과에선가 자료 제출을 거부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면 그 과에 가서 자료 좀 제출하라고 하소연하게 된다. 일부러 괴롭히는, 조금 비열한 방식이긴 하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자료를 받기 위한 ‘전쟁’은 늘 있는 일이지만, “입법부의 권한이 점점 축소되고 있다”라는 데에는 보좌진 대부분이 의견을 함께한다. 이는 그만큼 행정부의 권한과 임무가 상대적으로 더 막강해졌음을 의미한다. 국회 경력 10년차인 한 보좌관은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 때도 관료들은 상대하기 만만치 않은 대상이었다. 그러나 보수 정권이 집권하면서 행정부의 정보 공개가 훨씬 더 폐쇄적으로 가는 측면이 있다”라고 말했다. 행정부의 힘이 커질수록 국민의 알 권리는 축소된다.